Critic

불확실성의 대화   이승린 2021

뉴스에서 먼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의 흔적이나 고대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해당 이미지를 찾아 한참 들여다보곤 한다. 10만 년 전에 살았던 매머드의 대퇴부 뼈, 1500년 전 가야의 전사들이 사용한 항아리 속 조개껍데기, 430년 전 요절한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편지 등. 더 이상 자신의 시간을 살지 않고 현실의 이면을 떠돌다 발견된 과거의 흔적들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Will o the wisp》은 이름 모를 고고학자가 과거와 미래에 말을 걸기 위해 만들어놓은 작은 실험실 같다. 추연신이 현장에서 채집한 사물들은 얼핏 보면 어떤 언어보다도 더없이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자료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은 모두 시간이 어긋난 장소를 경유하며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적 구성을 더 많이 닮았다. 그 이야기는 마치 눈에 보이는 증거를 손에 쥐고도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학자의 끝없는 의심의 여정과도 같은 것이다. 

불확실성만큼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도 없지만, 또 이것만큼 질문을 발명하게 하는 힘도 드물다. 이와 관련해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 단상 위에 놓여있고, 그 단상 아래에는 코끼리가, 코끼리 아래에는 거북이, 거북이 아래에는 또 다른 무수한 거북이들이 연속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 ‘세계’라는 추상적 개념 아래에 다양한 시차로 흐르는 무수한 의미의 그물망을 설명하고자 든 예시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인류학자 뿐만 아니라 현장 한가운데서 회의와 의심으로 질문을 발굴해야만 하는 작가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시 제목인 ‘도깨비불’은 이 불확실성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도깨비불에 대해 묘사해보라 하면 아마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상상하는 도깨비불의 형상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인도 설화에 등장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여러 명의 장님이 각자 만진 코끼리의 부위가 다르니 머릿속으로 그린 코끼리의 형상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의 흔적에 말 걸으며 발견과 발굴의 이유를 찾으려는 행위 역시 장님 코끼리 만지듯 세계의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두루뭉수리한 상(像)을 그려보는 것과 유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근래에 한 시집에서 이런 글귀를 보았다. “조금씩 어긋난 대화가 좋다. 다 이해할 수 없어서 존중하게 되니까.” 이현승,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2021 
 언어의 불확실함이 갖는 힘을 잘 보여주는 문장인데 문득 작가도 이것을 잘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어긋난 장소에서의 대화란 매끄럽기가 어렵다. 어쩌면 시차 때문에 대화는 영원히 성사되지 못하고 공기 중을 계속 부유할지도 모른다. 끝없이 유영할 것만 같은, 그렇게 무한한 시간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은 과거와의 어긋난 대화에서 작가는 자신의 유한한 삶 속에 깃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1)이현승,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2021 

인류세의 아카이브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김민경 . 2019)

“인류세의 문제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적 삶 모두를 인간이 아닌 것의 관점, 인간 중심이 아닌 어떤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기 시작 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변곡점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작년 12월, 추연신 작가에게서 버드나무로 만든 펜을 받았다. 가느다란 가지에 잔가지가 여럿 있는 나뭇가지를 깎고 솜씨 좋게 다듬은 하얀 나무 펜이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무로 만든 펜은 나무가 아닌 무엇처럼 느껴지고 매끈한 표면은 하얀 뼛조각처럼 보이기도 했다. 직접 필기하는 것보다는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는 것이 더 익숙한 요즘, 유목 펜을 써보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이어리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펜을 잡고 쓰다 보니 이 나무의 유래가 궁금하다. 내게 온 버드나무 유목 펜은 작가가 동봉한 기록지에 따라 2018년에 청주에서 수집되고 2019년에 가공한 것이다. 그는 유목 펜에 그 기원에 대해 각각의 기록을 남겼다. 이를 통해 그가 걸었을 계곡과 강변, 해안에 대해서 그리고 나무의 기억에 대한 추적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유목펜 프로젝트는, 바다 또는 내륙, 계곡으로 이동하여 직접 나무파편을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후 수집한 나무 조각을 선별한 후 3-4회의 방부처리를 한 뒤 손질하고 다듬고 천공하고 볼펜심을 삽입하고 표면을 다듬는, 하나를 제작하기 위해 무려 15-20일이 걸리는 섬세한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유목 펜이다. 그는 이미 생명에서 떨어져 나온 유목流木을 채집하고 가공하여 새로운 쓰임새가 있는 무엇으로 만들어 다시 인공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작가는 무수히 많은 공산품 속에 결합되어 있는 도구의 단순 기능을 재진단하기 위하여,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인해 생략된 “쓰기”를 통해 인간의 행동 속 과정의 중요성에 대한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유목이 가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지식 체계를 구축하고자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을 구상하였다고 정의하였다. 그의 유목펜 프로젝트를 통해 버려진 나뭇가지는 새로운 쓰임을 얻고 재생한 셈이다. 

작가는 여러 해를 거쳐 유목을 채집하러 다니면서 바닷물에 떠밀려온 다양한 사물의 조각을 발견한다. 사용되다 버려진 사물의 파편들을 보며 이 조각이 얼마간의 시간을 거쳐 여기에 왔는지를 추론한다. 그는 부유하는 사물들이 흘러온 곳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그가 발견한 사물들을 [유목적 사물]이라 명명했다. 그는 그것이 흘러온 지점을 찾는 행위에 대해 유목이 내륙에서 바다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함이라 했다. 추연신이 채집하는 사물들의 공통적 특징은 어디에 쓰였을지 알 수 없는 ’파편‘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며, 여기서 작가의 관찰과 추론이 시작된다.

바다유목 작업은 내륙의 장소에서 발견되는 나뭇가지들을 줍고 기록하는 것으로 이어 진다.작품 [보호수]는 그 작업들의 일환으로 부러져 나온 가지들(유목)이 한때 보호수였을 것이라 가정한 작업이다. ’보호수‘라는 것이 희귀한 수종이나 오래된 나무를 보존하고자 하는 상징성을 가진 것을 생각할 때 이미 부러져 나온 유목은 보호수로의 기능을 상실한 존재이다. 유목이 온전한 상태였을 때의 환경과 본래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며, 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법의학적인 과정과도 닮아있다 말한다. 

이후 그의 발길은 도시, 그 중에서도 재개발 지역으로 향한다. 부서진 폐자재들 사이에서 그는 타일을 발견하였고, 이를 선택한 것은 도시를 산책하며 자주 목격한 사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타일이라는 것은 도시가 확장되고 개발되며 한때 꼭 필요한 건축의 내외장재였으나 시간이 지나 건물은 부서지고 사라진 후 파편만 남은 것이다. 그는 타일과 같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것들의 문화적 건축사적 연결고리를 유추하기 시작한다. 타일은 도시에서의 ’유목적 사물‘을 찾아 나선 그에게 가장 먼저 발견된 소재였던 것이다. 

재개발 지역의 남겨진 잔해들을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여럿 있지만, 사물에 포함되어있는 사람의 흔적과 냄새를 일부러 제거한다는 점에서 추연신의 ’유목적 사물‘은 두드러진 차이를 가진다.
그는 마치 법의학자가 발견한 증거물을 토대로 다음 단서를 찾아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같이, 수집한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 사물의 발생경로와 배경에 대한 추리를 시작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는 파편으로 남은 사물의 온전한 모습을 재구성 해낸다. 누군가가 사용했을 사물들에게서 개개인의 히스토리를 배제함으로써 감상에 젖는 것을 경계하는 작가의 객관적 시선은 다음 문장에 잘 요약되어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드라마틱한 요소는 제한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휴머니티에 집중한다기보다 감정선과 거리를 두고 더 많이 보기위해 선택한 추론하기의 기초가 명백한, 객관적 도출을 하는데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추연신, 인터뷰 중)


사라졌거나 기능을 빼앗긴 사물에 대한 그의 수집은 계속된다. 이를 통해 객관화된 사물은 개인의 것이 아닌 인류 전체의 역사 속 하나의 유물로 작용하게 된다. 그의 시선은 이제 제 자리가 아닌 낯선 곳에 놓인 사물로 향하고 있다. 앞으로의 작업 역시 그의 발길 닿는 어느 곳에서 발견되는 사물에 대한 것일 것으로 추측해본다. 예민하고 찬찬한 관찰의 시선이 어디로 향할지 지켜볼 것이다. 그의 집요한 아카이브가 언젠가 인류의 삶을 추론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는 것을 상상하며.

————————————
1)김상민, 김성윤, “물질의 귀환: 인류세 담론의 철학적 기초로서의 신유물론”, 문화과학,2019,p.68

  • 1땅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 
    추연신과의 대화에 이은 단상   /시각예술가 김온( 2018) 

    내가 어렸을때 생명이 있든 없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제스처(흔적, 표시)와 메시지(의도, 주장), 자세(태도)를 가지고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라사 드 셀라  Lhasa de Sela (1972-2010) 

    “결코, 내리는 눈은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  결코, 눈은 떨어지기 시작한 곳으로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날, 눈 쌓인 언덕 위에서 생을 마감한 산책가 시인, 소설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의 글귀이다. 그리고 눈은 기백(​é​lan)을 담고 날아가 소음의 흔적없이 침묵이라는 본질에 내려 앉아 눈의 기백은 조용히 재생된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땅에 닿자마자 사라지는 시초의 눈에게 삶의 불발을 역전시킨다. 다른 존재 방식으로 치환시키는 부드러운 타격 효과로 -’지극한 자명함’이라는 또 다른 이름, ‘순수함’은 줄곧 발저의 글에서 자주 발견되곤 한다. 순수한 발설은 너무나도 청명하여 우는자와 웃는자로 갈린다.- 각 개체의 눈송이들을 침묵이라는 광야로 압축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생의 지연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사람 추연신은 주운 나뭇가지를 적정 습도로 말리고 깍는 과정을 거쳐 어떤 조합(물)이 아닌 단독(물)로서 하나의 주체적인 사물을 만든다. 조밀한 과정과 동행하는 손의 움직임에 의해 발현된 단독물로서, 사물의 이야기를 마치 특정 개인 인생사로 서술하듯 면밀하게 기록화하고 시각화하기도 하며 다른 구조의 상물로 만들기도한다. 그러기까지 사람 추연신은 땅 위에서 찰나적으로 무생물처럼 박제되어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자와 같다. 발견 다음 행해지는  ‘줍기'. 몸을 낮추어 무언가를 걷어 들이는 행위가 반복되면 채집과 수집으로 이어진다. 쓸모 없어 버려진 것을 주워 의미를 부여하거나 쓸모 있음과 없음의 기준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아네스 바르다(Agnès Varda)의 <이삭줍기와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2000> 영화가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바르다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줍기’는, 사람 추연신의 행동과 맞닿아 있기도 하지만, 자연 태생적인 물체 채집과 수집은 참으로 자연적이여서, 실로 자연적이라 초자연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의 작업 행로를 들으면서 포착한 시초의 태도, 행동인 ‘걷기'와 ‘땅 바라보기'는 마치, 행함없이 행하는 행으로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포획되어 다가온다. 땅에서 떼어진 한 걸음 한 걸음이 자발적, 비자발적 사이에서 반복 재생되는 울타리를 내칠 때마다 다가오는, 또 다가오게 될 사물의 초자연적 형상이 그려짐은 그리 가볍지 않다.  쇠약하고 가벼운 형세로 물체는 아래, 밑, 지면(地面)에서 도달해야 할 곳을 기다린다.  사람은 ‘걷기'라는 표류를 시작한다. 시선의 정지로 그들과의 여정의 조짐이 보인다.  땅 위에 내려 앉은 모든 것들은 무력해보인다. 그 상태는 무용한 상황에 이르고 자연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홀연히 사라지는 시간으로 입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렇게 땅위에 떨어진 모든 것들은 연약하고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무게를 박탈당하고 사라질 태세를 하고 있다. 땅에 떨어진 모든 것은 부유한다. 연쇄 산책이 보내는 전갈의 형세와 형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에 추임새를 넣는다.       

  • 2------------------------------------ 
  • 3
    ------------------------------------------------------
  • 4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미술평론 이선영(2011)

    추연신의 최근 작품 [mass](2011)는 가느다랗게 나오는 색 볼펜을 느슨하게 쥐고 지휘하듯, 춤추듯, 스크럼블 에그를 만들 듯, 입자가 브라운 운동을 하듯 무수한 선이 그어져 생성된 어떤 단편이다. 이 단편은 불완전한 파편이 아니라, 나름의 자족성을 가진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시작된 이 드로잉 아닌 드로잉은 불확실성을 끌어들인다. 빈 바탕에 오똑하니 배치된 그것은 알이나 씨앗, 열매, 돌멩이, 사람의 얼굴 등이 연상된다. 푸른빛이 배어나오는 색은 단편에 무한의 느낌을 부여한다. 정처 없이 그어진 선들은 응집력을 가지고 교차되면서 자연스럽게 존재를 드러낸다. 그것은 둥그스름하지만 완벽한 구는 아니고 타원형인데, 세계의 시작을 알림직한 이 근원적 형태의 중심은 없다. 그것이 나아가야할 방향도 확실치 않다. 빈 중심을 도는 궤적들은 어떤 정확한 대상을 재현한 형태가 아니라, 무작위로 생성된 것이다. 그가 말하듯이 ‘체내에 축적된 화학물질을 외부에 고착시킨 후, 나를 숨기기 위한, 또는 나를 지탱하기 위해 유기적 구조를 만드는 유충의 생산적 노동’과 같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들은 무념무상, 그리고 그가 즐겨하는 산책이나 여행처럼 무위의 산물이다. 종이도 아니고 캔버스에 그려진 펜이 특이하다. 손에 쥐기도 불편한 200원 짜리 색 볼펜은 얇고 흐리게 나오는 불량 문구이기에 오히려 회화적 효과가 있다. 대여섯 가지 색상의 펜은 선을 남겨 두면서도 불확실하다. 펜은 그것을 쥔 손과 일체가 되어 함께 흔들거리며 흔적을 남긴다. 불어오는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맡긴다. 가느다란 색선의 궤적, 그것들의 집적은 솜사탕이나 누에가 갓 뽑은 비단 섬유처럼 부드럽고, 안개나 구름처럼 몽환적이다. 매끄러운 공간을 통과하는 유목적 선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행이지만, 완벽한 반복은 없다. 단편은 군집의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2011년에 제작된 [mass] 시리즈에는 어디서 떨어져 나온 지 불분명한 색색의 반투명 단편들이 모여 있다. 작품들에는 다양한 곡률을 가진 자연적 또는 인공적 입자들이 모여 있다. 씨앗이나 배아라는 잠재적 형상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개된다. 작품 [mass_감자](2011)는 감자처럼 생긴 울툭불툭한 형태 위에 싹이 머리털처럼 돋아나 있다. 작지만 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기적 같은 과정을 증거 한다. 작품 [mass_나방](2011)은 애벌레가 타원형 안에서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변태를 준비한다. 작품 [mass](2011)는 자체의 응집력을 잃고 파열한다. 푹 꺼져 가는 이 형상은 고체에서 곧장 기체로 급격히 변환 중이다. 이 작품은 공간적 고착이 아닌 시간에 따른 변이를 중시하는 그의 미학이 드러나 있다. 펜 드로잉 이전 그의 작품은 쇠라나 시냑의 그림처럼 점묘로 이루어진 섬세한 풍경이 주를 이루었다. 점묘화를 이루었던 입자 하나하나가 이제 화면 한가운데에 주인공이 된 셈이다. 추연신의 점묘화의 입자는 숫자로 되어 있다. 구상적인 형태와 색채를 채우는 숫자 입자들은 [numerical value]라는 제목이 예시하듯이, 촘촘하게 계산되고 체계화된 현대의 물질적 세계, 특히 코드가 조합된 세계를 상징한다. 패널 위에 네임 펜으로 그려진 점묘화들은 [영월](2011)이나 [numerical value 18_ 삼청동 길](2010)처럼 차분한 중간 톤으로 그려진 풍경부터, 다소 번잡해 보이는 시가지 풍경인 [대흥동](2011), [numerical value_오창](2010), [numerical value_평택 경찰서 오거리](2010), [numerical value 17 안성 ic 2](2010) 등이 있다. 차와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에 인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익명적 구조와 인간적 가치 사이의 갈등을 예시한다. 산 풍경의 경우에도 자연의 실재성이 아니라, 관광 상품화된 광경, 가령 미디어에 의해 걸러진 허상성이 강조된다. 
  • 5작품 [numerical value_car](2010), [numerical value16_골프](2010)처럼 움직이는 것은 자동차들이며 간혹 숫자 입자들은 제자리를 벗어나 연기처럼 흩날리곤 한다. 숫자 입자들은 이합집산을 통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모래알처럼 응집력은 강하지 않다. 점으로 가득 채워졌던 화면이 비워지면서 미소한 것이 중심에 놓이기 시작한다. 그 미소함은 반드시 자연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작품 [츄잉 껌에 싹이 나다](2010)처럼 커피숍 천정에 붙어있는 껌을 옆에 있는 종이에 그린 것도 있고, 병조각 같은 도시의 쓰레기에서도 보석 같은 것을 추출한다. 추연신의 최근 작품에 나타나듯이, 깨진 소주병이나 사이다 병 조각 같은 인공물조차도 오랜 시간의 더께를 둘러쓰면 자연화 된다. 시골에 위치한 공감 스튜디오의 한켠에는 화장품 샘플 통에 넣어둔 미소한 것들이 빼곡히 수집되어 있다. 대개 죽은 벌레나 이파리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작은 수집 품목조차도 줄이려고 노력한다. 비록 주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많이 쌓아놓는다는 것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중시하는 태도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설치작품 [소멸](2011)처럼, 숫자 형태로 만들어진 찰흙 덩어리를 방치함으로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게 한다. 생성만큼이나 소멸을 중시하는 그는 영원함이 아니라,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원한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가득 쌓여있는 것이다. 추연신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생겨나고 시들고 곰팡이 피고 무너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연에 나가서 몇 시간이고 앉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와 일렁이는 물의 진동을 바라볼 때 그는 희열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 깊이 새겨진 시간성을 알려준다. 뒤죽박죽된 선들이 쌓여 만들어진 형상처럼, 그 시간의 순서와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가 애용하는 펜은 자연스럽게 몸에 밴 필사의 관성을 따라가는 매체로, 무의식과 근육의 운동을 그대로 옮겨낸다. 그에게 색은 소묘 위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산물이다. 작업은 무엇인가를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직관을 그대로 필사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은 매우 단촐하다. 본디 자연은 불필요한 과잉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단순함을 통해 자연적 대상과 자연적 과정을 중첩시킨다. 대상은 변형되고 과정은 가시화된다. 자연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을 재현한 것은 아닌 추연신의 작품은 근원적이지만 무겁지 않다. 관념주의 또한 작품을 무겁게 하는 요소인데, 그는 많은 생각을 하지만 관념적인 작가는 아니다. 형상은 시작도 끝도 불분명한 화면과의 가벼운 접촉들의 산물일 뿐이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바람이나 무수한 낙수들이 만들어낸 형상이다. 스치는 듯 흐르는 듯 만들어진 형상들은 그것을 그린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 삶(또한 예술도)은 변화 그자체이다. 선은 의도와 목적을 구현하는 강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움직임으로 활기차다. 작가 자체도 시작과 종결점이 아니라, 매개자이다. 화가 파울 클레가 스스로에게 원했듯이, 작가는 뿌리와 잎 새 사이의 줄기처럼 양분과 수분을 통과시키는 도관일 따름이다. 추연신의 선은 선적이 아니라 동시적이다. 그것은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동시적으로 들려오는 장을 중시한다. 명확히 결과물을 보여주는 시각성의 절정에 문자나 숫자가 있다. 생산중심주의 사회는 다름 아닌 정확한 숫자로 보여주는 사회를 말한다. 숫자화 되지 않는 것은 너무 가치가 있거나 아예 무가치하다. 예술 또한 그러하다. 수 백 년 간 재현적 질서의 근간을 이루었던 르네상스식의 공간은 준 과학적인 시각적 공간이다. 시각적 관점의 세계는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을 전제한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의 역사를 다룬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문자란 오감을 작동시키는 말에 비해, 시각적인 것만을 추출하여 외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중세 말에 발명된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귀로 들리는 말을 가시적인 단어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 6맥루한에 의하면 감각이 분열되고 시각이 다른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은 획일적이고 반복 가능한 활자에 의해 서적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생겨난 일이다. 비문자적 양식이 함축성, 동시성, 불연속성과 관련됨에 비해, 시각 세계의 기본 요소는 균질성, 획일성, 반복성 등이다. 자연과학의 발전, 즉 비가시적 힘에 가시적인 형식을 부여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추연신의 작품에서 숫자 입자로 이루어진 도시, 차, 군함 같은 재현적 풍경은 명시성, 획일성, 연속성에 근거한 근대적 인쇄 문화의 산물이다. 균질적인 분자로 이루어진 숫자는 질이 아닌, 양적인 세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공존이 아닌 순서, 도약이 아닌 기계적 움직임, 공명이 아닌 단성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진짜로 추상미술이라고 해야 하는 것은 다른 감각 능력들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분절된 시각 감각 능력에만 기초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라고 지적한다. 르네상스 이래 그러한 재현적 질서가 근현대 사회를 추동해왔다. 활자 같은 글자들을 기계적으로 채워넣은 [numerical value] 시리즈에서 재현적 질서는 수량과 밀접하다. 로버트 넬슨과 리처드 샤프가 편집한 [미술사 사전]의 ‘재현’ 항목에는 방정식이라든지 온도계의 수은의 높이 같은 것들도 재현이라고 본다. 이 항목의 필자 데이비드 서머스에 따르면, ‘존재하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repraesentatio’는 흥미롭게도 ‘현금으로 지불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미지는 불가능한 대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등가의 것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금이 교환될 상품과 등가인 것처럼 상상력을 통해 대등한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는 재현과 상업의 유비적 관계를 지적한다. 재현의 세계는 다름 아닌 등가의 세계인 것이다. 해석은 바로 가격에 해당된다. 추연신의 점묘화에서 점들은 동질적이다. 여기에서 어떤 하나의 점은 다른 하나의 점과 똑같다. 그것은 합리적 개인처럼 다른 이와 대치될 수 있다. 그 세계는 기계적인 반복과 순환이 지배적이다. 원근법이 자리하는 유클리드 공간의 속성이 그러하다. 이러한 공간은 대상을 집어넣는 빈 곳에 불과하다. 이후 유화로 대변되는, 재현주의에 충실한 회화의 역사는 보이는 것을 쟁여놓는 ‘시각적인 금고’(존 버거)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추연신의 점묘화는 재현의 견고성을 그 정점에서 입자적 현상으로 와해시키려 한다. 기하학적 정의와 다른 유동적인 점들은 해체를 예시한다. 마치 색 모래로 정성껏 그린 만다라를 흩어뜨리는 승려 같은 몸짓이 이후의 작업에 이어진다. 
    이후 허공을 휘젓듯이 그어지는 선묘화에서 공간은 근대 물리학의 중성적 용기가 아니라, 그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현대 물리학의 공간에 상응하는 것이 된다. 곡선형 공간이 특징인 추연신의 드로잉은 공간의 기하학적 특성인 만곡이 중력을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재현주의의 출발이자 귀결인 구텐베르크의 세계를 해체한다. 추연신의 작품은 재현의 해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성을 향한다. 플라톤 이래의 재현주의 철학을 전복하고자 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은 발산과 탈중심화를 긍정하지 못한다고 본다. 재현의 근거가 사라져 있는 추연신의 작품은 모든 형식들에 저항하는 무바탕 안으로 비스듬히 빠져든다. 들뢰즈는 형상과 질료라는 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정해 놓은 최초 상태의 재현을 정의한다고 본다. 하지만 질료들을 용해시켜 버리고 모형화 된 것들을 해체하는 추상적인 선과 무바탕의 짝은 더 심층적이고 위협적이다. 
  • 7추연신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미규정성과 무바탕은 화학 조미료로 범벅된 자극적 스펙터클에 익숙한 현대인의 눈에 자연식의 슴슴한 맛을 권유한다. 이 미규정성과 무바탕에서 모든 것이 생겨난다. 그것은 하나의 중심만을 가지는 재현이 아니라,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하는 운동을 지향한다. 배아나 미분적인 요소가 있는 형상은 잠재성 안에 잠겨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잠재력을 띤 어떤 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언제나 발산하는 선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 잠재적인 것은 그자체로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물은 잠재적 상태에서 현실적 상태로, 그리고 다시 잠재적 상태로 변화한다. 추연신의 드로잉은 잠재적인 배아에 해당된다. 현실화와 분화는 언제나 진정한 창조이다. 분화는 어떤 선들의 창조를 함축하고 바로 그 선들을 따라 이루어진다. 작품은 차이의 고유한 역량을 내재한 반복을 통해 생성되는 장이 된다.